임대차 · 기타 민사사건
임대인은 목적물을 사용·수익하도록 할 의무가 있습니다. 반대로 임차인에게는 선량한 관리자로서 목적물을 보존하고, 임대차 종료 시 임대인에게 받은 상태 그대로 원상 회복하여 반환할 의무가 있습니다(민법 제374조, 제654조, 제615조).
그런데 목적물이 화재로 전소된 경우라면 어떨까요. 임대 목적물 자체가 없어졌으니 임대인은 임차인에게 목적물을 사용·수익하도록 할 수 없고, 임차인도 목적물을 보존하거나 반환할 수 없습니다. 이 경우 먼저 화재 원인을 확인해야 합니다. 최근 분석 기술의 발전으로 화재 원인을 대부분 밝혀낼 수 있다고 합니다. 만약 화재가 흡연이나 전열기 사용 부주의로 발생했다면 임차인의 책임일 가능성이 큽니다. 그러나 건물이 노후하거나 불량 자재로 인해 소방 설비가 제대로 관리되지 않아 화재가 발생했다면 임대인의 책임일 겁니다.
화재 원인을 단순히 한쪽의 책임으로 돌리기 어려운 경우도 있습니다. 예를 들어, 화재의 직접적인 원인이 전기 과열 등 임차인의 과실로 시작되었더라도, 화재 예방을 위한 기본적인 소방 설비가 설치되지 않아 피해가 확산된 경우라면 양측 모두 책임이 있을 수 있습니다. 또한, 오래된 구축 건물이나 복잡한 시설에서는 화재 원인 자체를 명확히 밝히기 어려운 경우도 드물지 않습니다.
화재의 귀책 사유를 특정하기 어려운 경우, 책임은 누구에게 있을까요? 대법원은 임차인에게 있다고 봅니다. 대법원은 1986년에 이러한 법리를 도입한 후 30년간 유지했습니다. 임차인은 임대차 종료 시 원상 복구 및 반환 의무가 있는데, 전소된 경우 이 의무를 이행할 수 없어 임대인에게 발생한 손해를 배상할 책임이 있습니다(물론 화재가 임대인의 책임으로 발생했음이 밝혀진 경우라면 당연히 임대인이 책임을 집니다).
그렇다면 화재가 다른 점포나 건물로 확산된 경우도 임차인이 모두 책임져야 할까요? 과거에는 그랬다. 의사 부부 A와 B는 강남구 9층에 성형외과와 치과를 임차해 운영했습니다. 성형외과와 치과에서 화재가 발생하여 9층 전체가 피해를 입었다. 발화 지점은 치과의 소독실로 추정되었으나 명확한 증거가 없어 원인 미상으로 판정되었습니다. 영업을 중단하게 된 A와 B는 임대인에게 보증금을 반환해 달라고 소송을 제기했으나, 임대인은 화재 원인이 불명이어도 임차인이 9층 전체에 대한 수리비를 배상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하급심과 달리 대법원은 임대인의 주장을 인정했습니다. 대법원은 A와 B가 임차한 성형외과와 치과 외에도 구조적으로 불가분의 일체를 이루는 9층 전체에 대한 손해배상의 의무가 있다고 판단했습니다. 결과적으로 의사 부부는 다른 점포의 수리비까지 배상해야 했습니다(대법원 2010. 4. 29. 선고 2009다96984 판결).
그러나 이러한 대법원의 일관된 입장에 대해, 화재 원인이 명확하지 않은 경우에도 임차인이 모든 책임을 부담하는 것은 부당하다는 비판이 많았다.
대법원은 전원합의체 판례를 통해 기존 입장을 변경했습니다. 경기도 광주시의 2층 조립식 패널 건물(‘샌드위치 패널’)에서 발생한 화재 사건이 그 사례다. 소유자 C는 2층을 가구 보관용 물류창고로, 1층은 D에게 임대해 골프용품 매장으로 사용하게 했습니다. 화재로 2층은 전소되고 1층도 일부 소실되었습니다. 국립과학수사연구소가 화재 원인을 분석했으나, 끝내 발화 원인을 특정하지 못했습니다. 발화 지점조차 분명하지 않았고, C는 1층 직원의 흡연이 원인이라고 주장했으나 D는 2층에서 더 심하게 탄 것을 근거로 2층에서 시작된 화재라고 반박했습니다.
C는 D에게 1층과 2층의 모든 손해를 배상하라며 소송을 제기했고, 하급심은 이를 인정했습니다. 하급심은 기존 논리를 적용해 조립식 패널 건물이 구조적으로 불가분의 일체를 이루고 있다는 이유로 D가 1층뿐 아니라 2층 물류창고의 손해도 배상해야 한다고 판단했습니다.
그러나 대법원은 임대차의 대상이 된 1층과 그렇지 않은 2층을 구분하여 판단했습니다. 대법원은 1층 골프용품 매장에 대해서는 기존과 동일하게 임차인이 배상해야 한다고 보았습니다. 다만, 2층 물류창고에 대한 손해까지 임차인에게 책임을 묻는 것은 부당하다고 판단했습니다. 2층의 손해는 임대인이 임차인의 계약 위반을 입증해야만 배상받을 수 있습니다(대법원 2017. 5. 18. 선고 2012다86895, 2012다86901 전원합의체 판결).
이 사건은 2012년 접수된 후 5년 만인 2017년에야 결론이 내려진 사건입니다. 다수의견 외에도 반대의견과 별개의견이 있었으며, 대법관들의 의견이 달라 결론 도출이 어려웠던 것으로 보입니다. 최종적으로 D는 2층 손해에 대한 배상 책임을 면했고, C가 이를 부담하게 되었습니다. 실제로는 D의 보험사가 배상했습니다. 손해 또한 제한될 수 있으며, 하급심은 D의 손해를 70%로 감액했습니다.
반면, 모텔 화재 사건에서는 다른 판단이 내려졌습니다. 인천 부평구에서 모텔을 운영하는 E와 투숙객 F 사이에서 발생한 소송이 그 예다. 화재로 7층 전체가 그을리고 6층은 물에 잠겼습니다. E는 F가 담배꽁초로 화재를 유발했다고 주장했으나, 화재 원인은 밝혀지지 않았습니다. E는 F를 상대로 손해배상 소송을 냈으나 인정되지 않았습니다.
E는 소송에서 모텔을 이용하는 숙박계약도 일시 사용을 위한 것이기는 하나 임대차 계약이라고 주장했습니다. 따라서 위 법리에 따라 임차인인 투숙객이 손해를 배상해야 한다는 거였습니다. 하지만 모텔 숙박 계약은 일반적인 임대차 계약과 다르게 숙박업자가 투숙객의 안전을 배려할 보호의무를 부담한다는 것이 대판례의 취지였습니다(대법원 2023. 11. 2. 선고 2023다244895 판결). 따라서 원인 미상의 화재가 발생한 경우 투숙객이 아닌 숙박업자가 책임을 진다는 겁니다.
다만, 흡연 금지 조치를 어긴 투숙객의 흡연으로 화재가 발생했다면(보다 정확하게는 흡연으로 인한 화재임이 밝혀진 경우라면), 투숙객이 당연히 책임을 집니다. 호텔에서 ‘흡연 금지’ 경고문을 부착하는 이유도 흡연으로 화재가 발생한 경우 투숙객의 책임을 명확히 하기 위한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