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린 신탁인지 뭔지 몰라요, 밀린 공사비나 주세요.

직불현장, 발주자가 직접 하청에 공사비 지급

건설 현장에는 원청인 종합건설업체와 계약을 맺고 전문공사를 수행하는 전문건설업체와 건설기계를 빌려주는 건설기계업체가 있습니다. 이러한 협력업체들은 현장에서는 하청, 법적으로는 하수급인(건설산업기본법) 또는 수급사업자(하도급법)라고 불립니다. 이러한 하청은 발주자가 아닌 원청과 공사도급계약을 체결하고 원청으로부터 공사대금을 받아야 하므로, 일반적으로 원청의 규모나 신용을 고려해 협력업체로 참여할지 결정합니다.

하도급법과 건설산업기본법에서는 일정한 경우 하청이 발주자로부터 직접 공사대금을 받을 수 있도록 규정하고 있습니다(하도급법 제14항 제1항, 건설산업기본법 제35조 제2항). 비록 하청과 발주자 사이에는 직접적인 거래관계가 없습니다. 하지만 직접지급합의가 있거나, 원청의 파산 등 지급불능사유가 발생하면 하청이 발주자에 직접 공사대금을 청구할 수 있도록 한 겁니다. 하청의 자재와 비용으로 완성된 최종 이익은 발주자에게 돌아가므로, 발주자가 하도급 공사대금을 하청에게 지급하도록 한 겁니다. 그 경우 하청은 원청보다는 발주자의 규모와 신용도를 주로 염두에 두고 협력업체에 참여할지 여부를 결정합니다. 특히 시공 전에 발주자와의 ‘직접지급합의’를 할 경우 더욱 그러합니다. 그러한 현장을 흔히 ‘직불현장’이라고도 부릅니다.

신탁사가 발주자로 참여하는 PF라면, 신탁사가 직불

그런데 PF 사업장에서는 양상이 다릅니다. PF 사업장에서의 발주자는 원칙적으로 영세한 시행업자, 즉 디벨로퍼입니다. 비록 사업부지를 확보했고 사업 아이템이 좋을지는 몰라도 자기자본율이 낮고 SPC인 시행사의 신용도는 하청에게 의미가 없습니다. 그런데 PF 사업장에서는 금융권으로부터 PF 대출을 받을 때 부동산신탁사가 직접 발주자로서 사업에 참여하는 관리형 토지신탁 계약을 체결합니다. 그러면 신탁사가 전면에 나서서 발주자로서 PF 사업장을 이끌게 되고, 하청과도 다시 직접지급합의를 하게 됩니다. 하청은 발주자가 유명한 신탁사인 사업장인 경우, 적어도 돈 떼일 염려는 없다고 안심합니다.

부산에서 오피스텔과 근린생활시설을 신축하여 분양하는 A사업장도 마찬가지였습니다. 협력업체인 하청은 신탁사가 제시한 직접지급합의서에 서명날인하고 안심한 하청은 혼신의 힘을 다해 약속한 공기를 맞추기 위해 노력했고, 신탁사로부터 직접 기성에 따른 공사비를 지급받았습니다. 일반 현장이었으면 시공사 눈치를 보며 공사비 지급의 지연이 빈번했던 다른 여느 사업장과는 달랐습니다.

분양이 잘 안됐다면, 공사비 지급 거절하는 신탁사

그런데 어느 날 분양이 실패해서 미분양이 되었다는 소식이 들려옵니다. 하청은 내심 불안했지만, 직불현장이고 신탁사가 직접 사업을 관리하는 현장이라 분양의 성패와 공사대금 지급과는 별다른 관계가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신탁사에게 남은 기성을 청구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신탁사 직원은 미안하지만 돈을 빌려준 금융사에게 지급할 분양대금이 안 들어와서 돈이 없으니 미분양이 해소될 때까지 기다려 달라고 했습니다. 협력업체는 공사를 잘 마쳤으니 빨리 기성을 받고 다른 현장으로 이동해야 하는데, 서울의 유명한 신탁사가 분양이 잘 안 되었다고 얼마 되지도 않을 공사대금 지급을 거절하는 상황이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신탁사 담당자에게 계속 따져 묻자, 담당자는 원청이 날인한 ‘관리형 토지신탁계약서’를 보여주었습니다. 신탁계약서 특약의 ‘자금집행순서’ 조항을 가리키며, 공사대금의 자금집행순서가 13순위인데 지금은 분양금이 안 들어와 앞 순위 자금도 지급할 여유가 없다고 설명했습니다. 하청은 ‘관리형 토지신탁계약서’라는 것을 생전 처음 보았습니다. 심지어 자신이 서명한 직접지급합의서에도 신탁계약에 관한 언급이 없었습니다. 난생 처음 보는 계약서를 내밀며 기성고 지급을 거절하는 것은 하청 입장에서는 매우 억울한 일이었습니다. 아무리 그래도 어느 정도 자금력이 있을 신탁사인데, 돈이 없어서 협력업체 기성도 해결 못해준다는 것이 믿기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요지부동이었습니다. 신탁사 직원은 원청이 청구했어도 같은 이유로 거절했을 것이라며 미안해 했습니다. 하청이라고 특별히 우대할 이유가 없다는 겁니다.

하청에 위험전가 안된다는 하급심, 대법은 신탁사 손 들어줘

결국 하청은 신탁사를 상대로 밀린 공사대금의 지급을 청구하는 소송을 제기했습니다. 하지만 제1심은 하청의 직접지급청구권이 신탁계약의 자금집행순서에 따라 제한될 수 있다고 하여 신탁사의 손을 들어주었습니다.

그러나 항소심에서는 판결이 뒤집혔습니다. 항소심은 특히 12가지 이유를 들어 신탁사에게 하청의 밀린 공사대금을 지급하라고 판결했습니다.[1] 하청에게 부동산 개발사업의 위험을 전가하는 것은 하도급대금의 직접지급청구권을 보장하는 법의 취지에 반한다고 보았습니다. 하청은 부동산 개발사업에서 이익이 발생하더라도 이익을 분배받지 못하는데, 완공 과정에서 상당한 비용을 지출한 하청에게 미분양 위험을 떠안게 하고, 그로 인한 개발이익은 전적으로 원청이나 발주자에게 귀속되게 하는 것은 부당하다는 겁니다.

그러자 이번에는 신탁사가 대법원에 상고했습니다. 신탁사는 사업장에서 별도로 계정을 만들어 자금을 관리하고 소정의 신탁보수만을 받는 데, 미분양에 따른 공사대금까지 지급해야 한다면 신탁사의 고유계정에서 돈을 지급할 수밖에 없고, 그렇다면 애시당초 이렇게 신탁계약을 체결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겁니다.

대법원은 최종적으로 신탁사의 손을 들어주며 사건을 마무리했습니다.[2] 원청이 신탁사업 약정 등에 따른 자금집행순서에 따라 공사대금을 청구하기로 합의한 이상, 신탁사는 하청의 공사대금 청구를 자금집행순서 약정을 이유로 거절할 수 있다고 보았습니다. 대법원은 자금집행순서의 성격을 법률상 ‘정지조건’이라고 판시했습니다. 하청이 신탁사에게 공사대금을 청구하려면 신탁사가 자금집행 순서에 따른 자금을 충분히 확보했음을 하청이 입증해야 한다는 뜻입니다.[3]

하청은 해당 사업장의 미분양이 해소되어 분양대금이 들어올 때까지 기다려야만 하는 처지에 놓이게 되었습니다. 이번 판결로 하청은 아무리 유명한 신탁사의 직불 현장이라도 더 이상은 안심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하청을 보호하기 위한 하도급대금 직접 지급제도의 보호막은 더욱 약해졌으므로, 하청은 스스로 보호하기 위해 손익을 따져 수지가 맞는 사업을 선별해서 개발사업에 따른 리스크 부담을 져야 합니다.

체크포인트

• 하청은 직접지급합의 등을 하면 발주자에게 직접 기성을 받을 수 있다.
• PF 사업장에서는 부동산신탁사에게 기성을 청구해서 받을 수 있으나, 신탁계약에 따른 집행순서의 제한을 받는다.
• 하청은 신탁계약에 따른 자금집행순서가 도달했다는 것을 입증해야 한다. 즉, 개발사업에 따른 리스크를 부담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