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손해배상
원고들은 피고들이 실질적으로 운영하는 I 주식회사에 자신들이 보유하던 J 주식 30만 주를 약 189억 원에 양도하는 계약을 체결했으나, 잔금 89억여 원을 받지 못했습니다. 원고들은 먼저 I 주식회사를 상대로 잔금 지급 소송을 제기하여 최종적으로 승소 판결을 확정받았습니다. 하지만 I 주식회사가 해산되자, 원고들은 I 주식회사의 실질적 운영자인 피고들이 법인격을 남용하여 채무를 면탈할 목적으로 회사의 자산을 처분했다고 주장하며 피고들에게 손해배상금 2억 원씩을 청구했습니다. 법원은 I 주식회사가 피고들의 개인기업에 불과할 정도로 법인격이 완전히 형해화되었거나 피고들이 채무 면탈을 위해 법인격을 남용했다고 보기 어렵다고 판단하여 원고들의 청구를 모두 기각했습니다.
원고들은 2017년 2월 7일 I 주식회사와 자신들이 소유하던 J 주식 30만 주를 189억 원에 양도하는 계약을 체결했습니다. I 주식회사는 주식 처분 대금으로 99억 4천3백만 원을 지급했으나, 잔금 89억 5천7백만 원은 지급하지 않았습니다. 이후 I 주식회사는 2017년 9월 4일부터 L 주식 등을 취득하는 등 자산 처분 및 매수를 반복했고, 2023년 9월 28일 해산 명령이 확정되었습니다.
원고들은 미지급 잔금을 받기 위해 2019년 10월 14일 I 주식회사를 상대로 선행소송을 제기했습니다. 이 소송은 원고들이 계약 당사자인지 여부를 둘러싸고 1, 2심에서 원고들이 패소했으나 대법원에서 원고들이 당사자라는 이유로 파기환송되었습니다. 결국 파기환송심 법원은 2024년 3월 28일 I 주식회사로 하여금 원고들에게 잔금을 지급하라는 판결을 선고했고, 이 판결은 2024년 4월 13일 확정되었습니다.
그러나 I 주식회사가 해산된 상황에서 원고들은 피고 E와 F가 I 주식회사의 법인격을 남용하여 채무를 면탈했다고 주장하며 피고들에게 각 2억 원의 손해배상 청구를 제기했습니다. 원고들은 I 주식회사가 피고들의 개인기업에 불과하며, 피고들이 잔금 채무 이행을 피하기 위해 L 주식을 취득하고 처분하는 방식으로 채무를 면탈했다고 주장했습니다.
회사가 외형상 법인의 형태를 갖추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실질적으로는 개인의 기업에 불과하다고 볼 정도로 법인격이 완전히 형해화되었는지 아니면 그 배후에 있는 개인이 법인 제도를 남용하여 채무를 면탈하였는지 여부가 핵심 쟁점이었습니다. 이를 통해 회사의 채무를 배후자인 개인에게 직접 물을 수 있는지가 법원의 판단 대상이었습니다.
법원은 원고들의 피고들에 대한 손해배상 청구를 모두 기각하고 소송비용은 원고들이 부담하도록 판결했습니다.
법원은 피고 F가 I 주식회사의 실질적 운영자였고 회사 계정에서 피고들에게 가수금 반환 명목으로 약 246억 원이 지급된 사실은 인정했습니다. 그러나 I 주식회사가 피고들의 개인기업에 불과하다고 볼 정도로 법인격이 형해화되었거나 피고들이 채무 면탈을 위해 법인격을 남용했다고는 보기 어렵다고 판단했습니다.
그 이유로는 법인과 개인은 원칙적으로 별개의 법인격을 가지며 I 주식회사의 회계상 피고들이 회사 자금을 불법적으로 유용했다고 보기 어렵다는 점이 들었습니다. 또한 I 주식회사의 본점 주소지가 피고들의 주소지와 일치하지 않고 피고 E 외에도 다른 이사들이 근무했던 것으로 보인다는 점도 고려되었습니다. 나아가 I 주식회사가 주식 양수도 계약 후 L 주식을 매수한 것을 두고 잔금 채무 면탈 행위로 보기도 어렵다고 판단했습니다. 이는 당시 I 주식회사에 충분한 유동성이 있었고 잔금 지급일이 1년 뒤였기 때문입니다. 마지막으로 원고들이 선행소송에서는 I 주식회사를 채무자로 주장했음에도 이 소송에서는 피고들을 채무자로 주장하는 것이 이미 해산된 회사로부터 잔금을 받기 어렵자 추가적인 집행 가능한 재산을 확보하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고 지적했습니다.
이 사건은 회사의 채무를 그 배후에 있는 개인에게 물을 수 있는지에 대한 '법인격 부인론' 또는 '법인격 남용론'을 다루고 있습니다.
법인격 부인론은 회사가 외형상으로는 법인의 형식을 갖추고 있으나 실질적으로는 그 법인격의 배후에 있는 개인의 기업에 불과하거나, 법률 적용을 회피하기 위한 수단으로 이용되는 경우에 적용됩니다. 이러한 경우, 회사와 배후자가 별개의 인격체임을 내세워 배후자의 책임을 부정하는 것은 신의성실의 원칙에 위반되어 허용될 수 없으며, 회사뿐만 아니라 그 배후자에게도 회사의 행위에 대한 책임을 물을 수 있다는 법리입니다(대법원 2001. 1. 19. 선고 97다21604 판결 등).
법인격이 형해화되었다고 판단하려면, 법률행위 시점을 기준으로 회사와 배후자 사이에 재산과 업무가 구분이 어려울 정도로 혼용되었는지, 주주총회나 이사회 등 법정 의사결정 절차를 밟지 않았는지, 회사 자본이 부실한 정도, 영업 규모 및 직원 수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하여 회사가 이름뿐이고 실질적으로 개인영업에 지나지 않는 상태로 볼 수 있어야 합니다.
법인격 남용론은 법인격이 형해화될 정도에 이르지 않더라도 회사의 배후에 있는 자가 회사를 자기 마음대로 이용할 수 있는 지배적 지위에 있고, 그 지위를 이용하여 채무면탈 등 법인 제도를 남용하는 행위를 한 경우에 적용됩니다. 이 경우에도 회사뿐만 아니라 배후자에게도 회사의 행위에 관한 책임을 물을 수 있습니다. 배후자가 법인 제도를 남용했는지 여부는 남용 행위 시점을 기준으로 법인격 형해화의 정도, 거래상대방의 인식이나 신뢰 등 제반 사정을 종합적으로 고려하여 개별적으로 판단해야 합니다(대법원 2008. 9. 11. 선고 2007다90982 판결 등).
이 판결에서는 비록 피고 F가 I 주식회사의 실질적 운영자였고 회사에서 피고들에게 가수금 반환 등의 명목으로 자금이 지급된 사실이 인정되었지만, 법인과 개인 간의 재산 혼용 정도, 법정 절차 준수 여부, 회사의 독립성(본점 주소지, 다른 이사 존재), 자산 처분의 시기와 목적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했을 때, I 주식회사가 완전히 피고들의 개인기업으로 형해화되었거나 피고들이 채무 면탈을 위해 법인격을 남용했다고 볼 증거가 부족하다고 판단하여 원고들의 청구를 기각했습니다.
회사의 채무에 대해 그 회사의 운영자나 주주 등 개인에게 책임을 묻기 위해서는 '법인격 부인' 또는 '법인격 남용'이라는 매우 엄격한 법리적 요건이 충족되어야 합니다.
법인격 부인을 주장하는 경우 회사의 재산과 운영자의 개인 재산이 구분 없이 혼용되었는지, 주주총회나 이사회 등 법정 절차를 지키지 않았는지, 자본이 실질적으로 부실한 상태였는지 등 회사가 이름만 법인일 뿐 실질적으로 개인 사업과 다름없는 상태였음을 입증할 객관적인 증거가 중요합니다.
법인격 남용을 주장하는 경우 회사의 배후자가 회사를 마음대로 지배하고 있었고, 그 지위를 이용해 채무 면탈과 같은 부당한 목적으로 법인 제도를 사용했음을 증명해야 합니다. 단순히 회사의 실질적 운영자라는 사실만으로는 개인 책임을 묻기 어렵습니다.
회사의 자산 처분 행위가 채무 면탈을 목적으로 한 것인지 판단할 때는 해당 행위가 이루어진 시점, 처분된 자산의 규모, 자금의 실제 사용처, 그리고 채무의 변제 기한 등 여러 사정을 종합적으로 고려합니다. 채무 이행 기한이 도래하기 전의 정상적인 경영 활동으로 볼 수 있는 경우에는 채무 면탈로 인정되기 어려울 수 있습니다.
이전에 동일한 채무에 대해 법인을 상대로 소송을 제기하여 승소했다면, 이후 동일한 채무에 대해 법인의 배후자에게 책임을 묻는 것은 소송의 일관성 측면에서 불리하게 작용할 수 있으므로, 초기 소송 전략 수립 시 신중하게 접근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