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축/재개발 · 손해배상
PF 사업에서 대형 시공사는 책임준공확약서만으로도 금융권의 대출 승인이 가능합니다. 하지만 중소, 중견 건설사는 상황이 다릅니다. 왠만한 입지가 아니고서는 신용도와 자본이 부족한 중소 중견 건설사의 책임준공확약만으로는 PF 대출이 승인하지 않습니다. 금융권은 PF 대출금의 회수를 확실히 보장받기 위해 추가적인 안전장치를 요구합니다.
이 떄 등장한 것이 바로 책임준공확약형 관리형 토지신탁, 이른바 ‘책준신탁’입니다. 이는 시공사가 책임준공의무를 이행하지 못할 경우, 부동산신탁사가 추가로 책임준공의무를 이행해 신용위험을 보완하는 구조입니다. 부동산신탁사의 책임준공확약서가 제출되어야 PF 대출이 승인되고 사업장이 자금을 확보할 수 있습니다.
책준신탁은 2016년경 은행 계열 신탁사에서 도입되었고, 2020년 금융감독원이 금융투자업규정 개정을 통해 공식적으로 승인했습니다. 이후 2021년 부동산 호황기를 맞으며 비금융 계열 신탁사들도 경쟁적으로 사업에 뛰어들었습니다. 특히 금융지주 계열 신탁사에서 책준신탁이 집중된 이유는 강력한 지주사의 자금력을 바탕으로 대출금 회수 리스크를 줄일 수 있다는 기대 때문이었습니다. 당시 금융권은 금융 계열사인 신탁사가 제출하는 책임준공확약서를 받고 PF 대출을 승인했으며, 이를 통해 다수의 부동산 개발 프로젝트가 원활히 진행되었습니다.
신탁사 입장에서도 책준신탁은 매력적인 사업이었습니다. 준공의무가 없는 일반적인 관리형 토지신탁보다 3~4배 높은 보수를 받을 수 있고, 부동산 경기가 좋을 때에는 리스크도 낮았습니다. 신탁사마다 경쟁적으로 책준신탁을 수주했고 이는 신탁업계의 급성장으로 이어졌습니다.
하지만 책준신탁은 신탁사가 준공의무를 부담해야 한다는 점에서 상당한 리스크를 내포합니다. 신탁사는 금융권과 약속한 준공 기한을 맞추기 위해 추가 자금을 투입해야 할 경우, 자신의 고유계정(자체자금)을 지출해야 합니다. 책임준공의 의무가 없는 일반적인 관리형 신탁사업에서는 신탁계정(대출금이나 분양 수입)에서 자금이 조달되지만, 책준신탁에서는 신탁사의 고유계정이 투입됩니다. 즉, 신탁사의 자체 자금을 사용해야 하는 겁니다.
창원의 한 오피스텔 및 근린생활시설 신축 사업에서는 중견 건설사가 준공에 어려움을 겪자 신탁사가 책임준공확약을 이행하기 위해 고유계정에서 수백억 원을 투입해 준공을 마쳤습니다. 분양대금이 들어오자 신탁사는 투입한 자금 중 약 100억 원을 고유계정으로 회수했습니다. 그러나 분양 실적이 저조해 대주들은 PF 대출금을 회수하지 못했고, 금융권은 신탁사가 먼저 100억 원을 회수한 것은 신탁계약 위반이라며 소송을 제기했습니다. 신탁계약에 따르면, 분양수입금으로 대주들이 먼저 대출금을 회수해야 한다는 조항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반면, 신탁사는 신탁계약에 따른 특약에 따라 고유계정에서 투입한 자금을 최우선적으로 회수할 권리가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이 같은 갈등은 신탁계약서의 해석과 책임준공의무의 성격을 둘러싼 복잡한 법적 논쟁으로 이어졌습니다. 신탁사와 금융권 모두 자신들의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 국내 내노라하는 대형 로펌들이 동원됐고, 2020년에 접수된 이 사건은 4년간의 법정 공방 끝에, 2024년 11월 대법원이 대주단의 손을 들어주며 일단락되었습니다(대법원 2024.11.14. 선고 2024다224249 판결).
대법원은 '책준신탁에서 신탁사의 준공의무는 시공사가 책임준공의무를 이행하지 못할 경우 분양대금 잔금 회수와 관련된 대주단의 위험을 방지하기 위해 부과된 것'이라며, '신탁사가 PF 대출금에 우선하여 자금을 회수할 수 없다'고 판시했습니다.[1]
이 판결은 향후 책준신탁의 운영 방식에 대한 중요한 기준이 될 가능성이 높고, 신탁사들의 사업 전략에 큰 영향을 미칠 것으로 보입니다. 결국, 신탁사는 수백억 원의 자체 자금을 투입하고도 이를 거의 회수하지 못하는 큰 손실을 입은 것이지요. 이로 인해 책준신탁은 신탁사의 재무 안정성을 위협하는 주요 원인으로 작용하게 되었으며, 부동산 시장의 변동성에 취약한 구조임이 여실히 드러났습니다.
그래도 이 사건은 준공이 완료된 사례였기에 분양을 통해 어느 정도 비용을 회수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부동산 경기 침체, 고금리, 공사비 상승 등으로 시공사 부도와 공사 지연이 잇따르는 상황에서 신탁사의 추가 자금 투입이 어려워지고, 준공이 되지 못하거나 준공 지연으로 수분양자들의 분양해지의 빌미를 제공한 사업장에서 이제 책임준공확약에 따른 신탁사의 책임을 추궁하는 사례가 증가하고 있습니다. 한때 황금알을 낳던 책준신탁은 이제 신탁업계의 위기를 불러오며, 업계는 깊은 늪에 빠져들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신탁사는 어떤 책임을 져야 할까요. 신탁사가 서명 날인한 책임준공확약서에는 '신탁사는 책임준공의무 미이행으로 인해 대주에게 발생한 손해(대출원리금 및 연체이자)를 배상한다'고 명시되어 있습니다. 금융권은 신탁사가 이른바 연대보증이나 담보를 제공한 것처럼, PF 대출원리금과 연체이자를 전액 배상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소송을 제기하고 있습니다. 실제로 앞선 대법원 판결에서도 신탁사가 대출금 전액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한다는 취지로 판단되었습니다. 이는 신탁사가 대출금 전액에 대한 위험을 부담해야 한다는 겁니다.
반면, 신탁사는 '약속한 대로 책임은 지지만, 대출원리금 전액을 변제할 의무는 없다'고 반박합니다. '책임준공확약서의 손해배상은 실제로 발생한 손해만을 대상으로 해야 하며, 이는 민법상 손해배상 예정액 조항에 따라 과도한 배상은 법원이 감액할 수 있습니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2024년 10월, 정부는 책임준공확약 토지신탁 업무처리 모범규준을 발표했습니다. 이에 따라 손해배상 범위를 책임준공의무 미이행으로 대출원리금 회수가 지연되어 발생한 실제 손해액으로 한정하고, 대출원리금 전액 배상은 금지하도록 결정했습니다. 또한, 신탁사가 준공 필수 사업비를 집행한 경우 대주단의 대출원리금보다 선순위로 상환받을 수 있도록 규정을 변경했습니다. 이는 신탁업계의 요구를 대부분 반영한 내용입니다.
다만, 이러한 규정 변경으로 대주단이 PF 대출을 승인할지 여부가 관건입니다. 금융권은 대형 시공사의 책임준공확약이나 이에 준하는 신탁사의 확약을 요구해왔으나, 안전장치가 부족한 상황에서는 PF 대출 승인에 주저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특히 금융권은 책임준공확약의 안정성이 약화될 경우, 대출 승인 기준을 더 엄격히 적용할 가능성이 있으며, 이는 PF 시장 전반에 긴장감을 더할 수 있습니다. 결과적으로 PF 자금이 원활히 조달되지 않을 경우, PF 개발사업의 전망은 어둡습니다. 계속 신축이 귀해질 것이라는 말이 나오는 것도 이 때문입니다.
[1] 다만, 신탁사가 부족한 운영계좌로 납부한 취득세 등 47억 원은 신탁사무처리비용으로 인정되어 먼저 회수할 수 있다고 판단해 그 부분은 파기환송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