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대차
갭투자한 부동산의 임대인, 즉 소유자는 시세 차익을 기대하며 적절한 시기에 부동산을 처분해 실현하고자 합니다. 임대인이 부동산을 시장에 내놓으면, 매수인은 중개사와 함께 집을 둘러본 후 마음에 들면 가격 흥정을 시작합니다(물론, 부동산이 폭등하면 집도 안 보고 계약하는 경우도 흔합니다).
그런데 매수인이 방문하는 집은 임차인이 거주 중인 집이며, 이 과정에서 임차인은 집주인이 바뀔 것이라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집주인이 바뀌면 계약 조건이 변경되거나 전세보증을 변경하기 위해 매수인과 기존 임차인이 임대차계약서를 새로 작성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하지만 굳이 추가로 수수료를 내면서까지 새로 계약서를 쓸 필요는 없습니다. 이는 주택임대차보호법에서 임대차 계약의 승계를 규정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임차 주택의 양수인은 기존 임대인의 지위를 자동으로 승계합니다(주택임대차보호법 제3조 제4항). 법률적으로 임대차는 기존 집주인과 임차인 사이의 계약입니다. 따라서 새 집주인은 기존 임대차계약과 무관하며, 원칙적으로 임차인에게 보증금을 돌려줄 의무가 없습니다.
하지만 종전 집주인은 이미 집 팔고 떠났습니다. 따라서 임차인이 이미 떠난 집주인에게 보증금을 돌려받기는 현실적으로 어렵고, 그렇게 보증금을 떼인 세입자가 늘어났습니다. 그러자 법은 집주인이 바뀌면 자동으로 임대인의 지위를 승계하도록 한 겁니다. 이는 1983년 주택임대차보호법이 처음 개정될 때 도입되었습니다. 이처럼 임차인은 집주인이 바뀌어도 새 집주인으로부터 보증금을 받을 수 있어 집이 팔려도 안심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세입자가 법인일 경우는 상황이 좀 다릅니다. 주택임대차보호법에 따른 보호를 받으려면(즉, 대항력을 얻으려면) 임차인은 인도와 주민등록을 마쳐야 합니다. 그러나 법인은 주민등록을 할 수 없으므로 대항력을 가질 수 없으며, 임대인의 승계 규정도 적용되지 않습니다. 따라서 이 경우 기존 임대인, 즉 종전 집주인은 여전히 법인에게 임대차보증금을 반환해야 할 책임을 지게 됩니다.
대구의 한 다가구 주택 소유자인 A는 2017년 준정부기관(진흥원)인 B 법인에게 임대했고, B 법인은 이를 직원 사택으로 활용했습니다. A는 정부기관인 B 법인을 세입자로 들이며 안정적인 월세는 물론이고 집도 쉽게 팔릴 거라며 기뻐했습니다. 이후 2019년, A는 새 소유자인 C에게 건물을 매도했습니다. A와 C는 ‘임차인 인수 조건’(즉, 기존 임차인의 임대차보증금을 인수하는 조건)으로 매매계약을 체결했고, 매매대금도 임대차보증금을 공제한 금액으로 정산했습니다. 또한 임대차계약서에는 특약으로 ‘현 임대보증금 8,600만 원은 매수자가 승계한다'는 내용을 명시했습니다.
하지만 집주인이 바뀐 지 몇 달 뒤, 임대차가 종료되었으나 C는 보증금을 반환하지 않았습니다. 이에 B 법인은 A를 상대로 임대차보증금을 돌려달라는 소송을 제기했습니다.[1]
소장을 받아 본 A는 C가 임대인 지위를 승계했으며, 자신은 보증금까고 매매대금을 줬다며 억울함을 호소했습니다. 이후 변호사와의 상담 과정에서 A는 법인이 세입자인 경우 임대인 지위를 승계하지 않는다는 점을 알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A는 계약 당시 특약에 ‘보증금을 매수자가 승계한다'고 명시했으므로, 자신은 이미 보증금반환 책임을 면했고 C가 반환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매매계약 특약에 따라 C가 임대차보증금 반환 의무를 부담한다는 점은 분명했습니다. 그러나 A가 임대차보증금 반환책임을 면하는지가 이 사건의 쟁점이었습니다. 법적으로는 A가 채무를 면제받으면 이는 ‘면책적 채무인수’이고, 면제받지 못하면 ‘병존적 채무인수(또는 이행인수)’로 분류됩니다.
그런데, 판례는 부동산 매수인이 매매목적물과 관련된 임대차보증금 반환채무 등을 인수하며 그 채무액을 매매대금에서 공제하기로 약정한 경우,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 이는 면책적 채무인수가 아니라 병존적 채무인수로 봅니다. 면책적 채무인수로 인정받으려면 채권자, 즉 임차인의 승낙이 필요합니다. 승낙은 반드시 서면일 필요까지는 없으며, 묵시적인 승낙도 가능합니다. 따라서 임차인이 승낙하면 종전 집주인은 면책될 수 있습니다.
이 사건에서도 임차인인 B 법인이 승낙했는지가 쟁점이었습니다. A는 B 법인에게 매매계약 체결과 임대차보증금 반환채무 인수 사실을 통지했으며, B 법인이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고 C의 변제 능력에 의문을 제기한 적도 없다고 했습니다. B 법인이 묵시적으로 승낙했습니다. 항소심은 이를 받아들여 제1심 판결을 취소하고, B 법인의 임대차보증금 청구를 기각했습니다. 소송 과정에서 B 법인이 C에게 먼저 보증금 반환을 요구한 사실과 내부 문서에 주 채무자로 C가 기재된 사실도 밝혀졌습니다.
그러나 대법원은 파기환송하며 판단을 달리했습니다(대법원 2024. 10. 25. 선고 2024다249378 판결). 대법원은 B 법인이 원칙적으로 주택임대차보호법에 따른 보호를 받을 수 없는 법인이라는 점과, 피고나 C로부터 전세권 등 임대차보증금 반환을 담보할 수 있는 별도의 수단을 제공받지 못했다는 점을 고려했습니다. 즉, B 법인이 이러한 상황을 충분히 알고도 면책적 채무인수의 결과를 감수할 만한 합리적 이유가 없었다는 겁니다.
만약 A를 면책되게 된다면, B 법인이 보증금을 반환받을 수 있는 지 여부, 즉 채권 실현 여부는 새로운 채무자인 C의 자력이나 채무이행의 성실성에 달려 있게 됩니다. 그런데 B 법인이 C의 자력을 조사하거나 확인한 정황은 확인되지 않았다고 지적했습니다. 물론 B 법인이 새로운 C에게 임대차보증금 반환을 먼저 요구하기는 했지만, 이는 임대차보증금 회수 가능성을 높이기 위한 일반적인 조치에 불과하며, 이를 C를 면책시키는 승낙의 의사표시로 간주하기는 어렵다고 판단했습니다.
결국 A는 보증금을 다시 반환해야 하는 상황에 놓이게 되었습니다. 물론 A는 C에게 공제했던 보증금을 돌려달라고 요구할 수 있으나, C가 이를 반환할 능력이 있을 가능성은 희박합니다. A는 처음 매매계약을 체결할 때 B 법인도 참여시켜 ‘면책적 채무인수에 대한 동의’를 명확히 받았어야 했습니다. 동의가 없었다면 임대차보증금을 공제해서는 안 되는 상황이었습니다. A가 돌이켜 생각했으면, 법인을 임차인으로 들였다고 마냥 좋아할 일이 아니었던 거였습니다.
[1] 실제 소송은 전세보증보험을 강비한 주택도시보증공사가 B 법인에게 보증금을 지급하고 B 법인을 대위하여 A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한 사안이었으나, 이해를 위해 단순화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