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대차 · 채권/채무
주택이든 상가든 일단 임대차계약을 체결하면, 임차인은 계약서에 적힌 잔금일까지 보증금을 마련해 임대인에게 지급해야 합니다. 그러면 임대인은 임차인에게 잔금일에 부동산을 인도해서 임차인으로 사용할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이처럼 임대인은 목적물을 임차인에게 인도하고 계약 존속 중 그 사용·수익에 필요한 상태를 유지할 의무가 있습니다(민법 제623조).
그런데, 때로는 계약 후 임차인 측의 사정이 생겨서 잔금을 다 마련하지 못할 경우가 있습니다. 통상 그러하면 임차인이 사정을 얘기하고 임대인과 임차인이 협의하여 월세를 더 올리거나 잔금 지급을 몇 달 유예하여 좋게 해결합니다. 하지만 만약 임대인이 계약대로 하자면 안 물러서면, 임차인은 사채 빚을 끌어오더라도 어쩄든 보증금을 어떻게든 마련해야 합니다.
하지만 임차인이 그럼에도 잔금을 못 마련한다면, 집 주인은 원칙적으로는 임차인에게 부동산의 인도, 즉 비밀번호를 알려주거나 열쇠를 줄 의무가 없습니다. 이는 보증금 중 일부만 미납된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예를 들어, 1억 원의 임대차보증금 중 1,000만 원만 미납되고 9,000만 원은 지급했더라도, 집주인은 나머지 보증금을 완납할 때까지 부동산의 인도를 거절할 수 있습니다. 부동산 인도라는 의무가 성질상 가분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에 그러합니다.
이렇게 임차인이 보증금을 완납하지 못한 상황에서 잔금일이 도래하면 임차인은 원칙적으로 월세를 내야 합니다. 설령 부동산을 인도받지 못해도 그렇습니다. 임차인의 차임 지급의무는 임대차계약을 하면 효력이 발생하고, 이는 임대인으로부터 목적물을 인도받았는지와 무관합니다. 따라서 설령 임대인이 보증금을 다 받지 못했다며 열쇠를 안 내주어도, 잔금일이 되면 임차인으로서는 일단 월세를 내야 합니다.
부동산을 사용수익도 못하면서 월세를 내야 하는 상황은 임차인에게 불합리해 보이긴 합니다. 따라서 부동산인도를 받지 못한 상황에서 임차인이 차임을 내야 하는 건, 임대인이 자신의 의무를 이행하거나 이행을 제공하고 있는 경우를 전제로 합니다. 이행이라고 하면 ‘잔금이 완납되면 부동산을 인도하는 것’이고, ‘이행의 제공’이라고 하면 ‘임차인이 잔금을 완납하면 언제든지 부동산을 인도할 수 있도록 만반의 준비를 다 해놓는 것’을 의미합니다.
사례로 확인해 보겠습니다. 시흥시의 음악학원을 운영하려고 한 A 원장은 임대인 B가 3억 6,500만 원에 분양받은 상가를 보증금 2,500만 원, 월세 190만 원으로 정해 임차했습니다. 그런데 A는 잔금 1,750만 원을 끝내 마련하지 못한 채 잔금 지급일이 도래했습니다. 이후 B는 해당 상가를 새로운 임대인 C에게 매도했고, C는 상가를 담보로 제공해 은행에서 2억 원의 대출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C는 자신이 임대인의 지위를 승계했는데 A가 월세를 안 냈다며 A를 사대로 월세 전액인 5,000만 원의 지급을 요구하며 소송을 냈습니다.
소장을 받아본 A 원장은 자신은 단 하루도 학원을 운영한 적이 없다면서 억울함을 표시했습니다. 임대를 한 B나 그 이후에 승계한 C나 누구도 자신에게 열쇠를 준 적이 없는데 왜 자기가 월세를 내야 하냐고 했습니다. 그리고 물론 잔금을 미납했지만, 잔금을 납입하기 전에 새로운 임대인이 이미 부동산을 담보로 설정해 대출을 받았고, 자칫하면 보증금을 떼일 수 있기에 잔금을 지급할 수 없었다고 하소연했습니다.
반면 B와 C는 자신들이 임대인으로서의 모든 의무를 다했다고 주장했습니다. 즉 A에게 인도되지 않았더라도 이 사건 각 임대차계약은 유효하고, 2020년 9월 14일 공인중개사를 통해 '임차인이 잔금을 치르면 입주지원센터에서 열쇠를 받을 수 있고 인테리어 공사를 진행하는 데도 문제가 없다'는 취지를 통지했으니 임대차 목적물 인도의 의무를 다했으며, 단지 A가 잔금을 안 치러서 열쇠를 못 받은 것일 뿐, A는 2년치 임대를 모조리 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대법원은 결과적으로는 임차인인 A의 손을 들어주었니다(대법원 2024. 9. 13. 선고 2024다256116 판결). 이유는 조금 달랐습니다. 대법원은 임차인의 차임 지급의무는 그가 임대인으로부터 목적물을 인도받았는지와 무관하게 임대차계약의 효력으로서 발생하는 것을 재차 확인했습니다. 그리고 임대인의 사용수익 의무는 임차인의 차임 지급의무와 서로 대응하는 관계에 있으므로, 임대인이 의무를 불이행하여 목적물의 사용·수익에 지장이 있으면 임차인은 지장이 있는 한도에서 차임 지급을 거절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이 사건에서도 B, C의 주장대로 열쇠는 입주지원센터에 보관되어 있었기에 임대인인 B나 C가 동산을 현실적으로 인도하지 않았더라도 자신의 의무를 게속 이행 제공하고 그러한 이행 제공 상태가 계속된다면 A로서도 차임 지급을 거절할 수 없었습니다. 여기까지는 B와 C가 잘못한 것이 없었습니다.
하지만 정작 문제는 따로 있었습니다. B와 C가 이러한 점을 A에게 알리지 않았던 겁니다. 물론 B와 C는 공인중개사를 통해 A에게 그러한 사실을 알렸다고 주장했으나, 공인중개사가 A에게 그러한 사실을 알렸다는 증거는 끝내 제출되지 못했습니다. 만약 B와 C가 A에게 직접 ‘열쇠를 입주지원센터에 보관하고 있으니, 잔금 치르고 가지고 가세요’라는 짤막한 메시지 하나만 보냈어도 A로서는 꼼짝없이 약 5,000만 원에 달하는 2년치 월세를 낼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지만 ‘B와 C의 약간의 기민함 부족’이라는 행운으로 A는 얼떨결에 승소하여 차임지급을 면할 수 있었습니다.
다른 양상으로 차임 지급을 면할 수 있는 경우도 있습니다. D는 거제도에 있는 영화관 E로부터 월 차임 800만 원에 임차했습니다. 하지만 위층 나이트클럽에서 인테리어 공사를 하던 중 화재가 발생해 전소되었고, 진화 과정에서 승강기는 침수되고 외벽과 내부 계단은 그을음에 심하게 훼손되었습니다. 이에 D는 영화관 영업을 할 수 없었고, 화재로 훼손된 영화관을 사용·수익할 수 있는 상태로 회복하기 위해 보수공사비 1,500만 원을 들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D는 공사비의 지급을 이유로 2달 치 차임 지급을 거절했고, 2기 이상의 차임을 연체하자 건물주는 바로 소장을 보내왔습니다.
대법원은 D가 지출한 공사비를 '필요비'로 보았습니다. 필요비는 임차인이 임차물의 보존을 위하여 지출한 비용으로서 임대차계약에서 임대인은 목적물을 계약 존속 중 사용·수익에 필요한 상태로 유지할 의무를 부담하며, 이러한 의무와 관련한 임차물의 보존을 위한 비용도 임대인이 부담해야 하므로, 임차인이 필요비를 지출하면 임대인은 이를 상환할 의무가 있다고 판단했습니다(대법원 2024. 9. 13. 선고 2024다256116 판결).
임대인의 필요비 상환 의무는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 임차인의 차임 지급의무와 서로 대응하는 관계에 있으므로, 임차인은 지출한 필요비 금액의 한도에서 차임 지급을 거절할 수 있다고 본 겁니다.
만약 D가 화재로 인한 보수를 위한 공사비가 아니라 영화관 인테리어를 위한 공사를 했다면 어떨까, 임대인은 이미 사용수익에 필요한 조치를 했고, 일반적인 임대차에서 집주인이 이것까지 책임질 이유는 없을 겁니다. 이를 필요비가 아닌 유익비라 합니다. 따라서 인테리어 공사를 했다고 차임지급을 거절할 수 없는 것이 상식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