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2조(건설공사에 관한 도급계약의 원칙) ⑤ 건설공사 도급계약의 내용이 당사자 일방에게 현저히 불공정한 경우로서 다음 각 호의 어느 하나에 해당하는 경우에는 그 부분에 한정하여 무효로 합니다. 계약체결 이후 설계변경, 경제 상황의 변동에 따라 발생하는 계약금액의 변경을 상당한 이유 없이 인정하지 아니하거나 그 부담을 상대방에게 떠넘기는 경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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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축/재개발 · 금융
코로나19 팬데믹으로 인한 유동성 공급, 우크라이나 전쟁의 확산, 공급망 축소 등으로 물가가 급등했습니다. 미국의 2022년 소비자물가지수(CPI)가 8.5%까지 기록하면서 41년 만에 최고치를 경신했고, 이에 대응하느라 미국 연방준비위원회는 빅스텝(0.5%)을 넘어 4차례의 자이언트 스텝(0.75%) 금리 인상을 단행했습니다. 0%의 초저금리를 4.25%~4.5%까지 끌어올리는 데 1년이 채 걸리지 않았으며, 한국도 1.25%의 금리를 3.25%까지 인상했습니다. 미국과의 기준금리가 벌어지자 환율은 급등하고, 기업들은 달러 확보에 비상이 걸렸습니다.
그러자 건설 현장은 문제가 더욱 심각했습니다. 주로 수입에 의존하는 철근 가격이 급등했고, 여기에 안전운임제 확대와 운송료 상승을 요구한 화물연대의 전면 파업까지 겹치면서 시멘트 공급에 심각한 차질이 생겼습니다. 정부가 화물 노동자에게 시멘트 운송부터 개시하라는 ‘업무개시명령’을 최초로 발동하는 초강수를 두었고, 갈등은 더욱 심각해졌습니다. 유연하게 대응하고 있다고 하지만, 주 52시간 근로제가 소규모 사업장에도 전면 시행되면서 건설현장에서는 마찰이 이어졌고, 공기를 맞추기 위해 어쩔 수 없이 근로자를 추가로 고용할 수밖에 없게 되었습니다. 이는 다시 원가 상승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2020년만 하더라도 400만 원대 였던 공사비는 700만 원까지 상승했고, 고급 아파트는 무려 1,000만 원까지 공사비가 상승했습니다. 2024년 초에는 서초구의 한 재건축 사업장에서 조합이 제시한 평당 907만 원의 공사비에도 건설사들이 시공자 참여를 주저해 결국 유찰되었습니다. 이제 건설사의 태도도 달라졌습니다. 시공사 선정을 위해 치열하게 영업하던 모습은 온데간데 없고, 오히려 사업주체가 몸값이 높아진 발주자가 건설사를 모시기 위해 상당한 수익을 포기해야 했습니다.
문제는 기존에 체결한 공사 계약이었습니다. 부동산 경기가 한창이었던 2020년까지 시공사들은 앞다투어 시공자 선정에 참여했습니다. 시공자로 선정되면 공사도급계약을 체결합니다. 공사도급계약에는 ES 조항(Escalation Clause)이 있습니다. 원자재 가격 및 인건비 변동에 따른 계약금액 조정 조항니다. 그런데 발주자가 물가변동 조항을 제외하거나 실착공 이후에는 물가변동을 배제하는 조건을 내걸기도 합니다.
에너지시설을 건설했던 A 현장이 그러했습니다. 2007년 입찰 시에는 발주자인 LH는 ‘고정불변계약’의 입찰금액을 적어내야 하며, 이는 계약 기간 동안 발생할 수 있는 물가변동 등을 모두 고려해야 한다고 못을 박았습니다.
건설사도 수용해 도급계약을 체결했으나, 2008년 세계적인 금융위기로 환율이 상승하며 가스터빈 등의 가격이 폭등했습니다. 이에 건설사는 발주자에게 계약금액 조정을 요청했지만, 발주자는 ‘물가변동배제특약’을 이유로 공사비 인상을 거절했습니다. 이 사건은 결국 2010년에 법정소송으로 번져 2017년에야 대법원 전원합의체 판결로 종결되었습니다.
대법원은 다수 의견으로 물가변동배제 특약이 유효하다고 보았습니다. 물가변동배제 특약이 효력이 없으려면, 그 특약이 계약 상대자에게 다소 불이익하다는 점만으로는 부족하고, 계약 상대자의 정당한 이익과 합리적인 기대에 반하여 형평에 어긋나는 특약을 정함으로써 계약상대자에게 부당하게 불이익을 주었다는 점이 인정되어야 한다고 판단했습니다.[1] 물가변동배제 특약은 대체로 유효하게 평가되었습니다. 건설사가 공사비를 올려달라 해도 발주자는 안 올린다는 약속을 내세워 공사비를 시공사에게 전가하거나 적어도 유리하게 협상을 할 수는 있었던 겁니다.
그런데 2013년 8월에 건설산업기본법에 다음과 같은 규정이 신설되었습니다.[2]
제22조(건설공사에 관한 도급계약의 원칙) ⑤ 건설공사 도급계약의 내용이 당사자 일방에게 현저히 불공정한 경우로서 다음 각 호의 어느 하나에 해당하는 경우에는 그 부분에 한정하여 무효로 합니다. 계약체결 이후 설계변경, 경제 상황의 변동에 따라 발생하는 계약금액의 변경을 상당한 이유 없이 인정하지 아니하거나 그 부담을 상대방에게 떠넘기는 경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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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위 규정이 신설되기 전에 발생한 대법원 판례에서는 해당 규정이 적용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대법원에서도 이를 검토하지 않았을 리는 없었을 겁니다. 그럼에도 전원합의체 판례에서 보수적인 결론이 도출되었기에, 일선 법원에서도 위 건설산업기본법 제22조 제5항 제1호를 적용하는 경우는 사실상 없었다고 봐도 무방합니다.
하지만 2022년부터 치솟는 공사비로 인한 부담을 떠안은 건설업계에서는 위 건설산업기본법의 규정을 활용해 이른바 ‘물가변동 배제특약’을 무효로 할 방법을 고민하기 시작했습니다. 2022년에는 대한건설협회장 명의의 질의에 국토교통부 장관 명의로 ‘물가변동으로 인한 계약금액의 조정을 인정하지 않을 상당한 이유가 없으면 일부 무효가 될 수 있습니다’는 회신공문이 배포되었고, 이는 현장에서 활용됐습니다. 그러나 법원은 여전히 신중한 입장이었습니다.
그런데 최근 부산고등법원은 건설산업기본법 제22조 제5항 제1호를 적용한 판결을 나와 주목을 받았습니다. 부산의 B 교회는 2020년 7월 교회 건물을 증축하는 공사를 발주하면서 ‘물가 상승 등으로 도급금액을 증액할 수 없도록’ 하는 특약을 요구했고, 건설사도 이를 수용했습니다. 그러나 인근 주차타워 공사가 지연되자 교회는 착공을 늦춰달라고 요청했고, 건설사가 이를 수용했습니다. 당초 착공 예정일로부터 8개월이 지나는 동안 철근 가격이 2배가량 상승하자 건설사는 해당 특약이 무효라고 주장했습니다.
신중하게 접근한 제1심과는 달리 부산고등법원은 교회 측의 사정으로 착공이 연기되었고, 원자재 가격의 대폭 인상이 발생했음에도 도급금액에 이를 반영하지 않는 것은 계약금액 변경을 상당한 이유 없이 인정하지 않은 것으로 보아 현저히 불공정하다고 판단했습니다.[3] 대법원도 심리불속행 기각 판결로 이를 지지했습니다
물론 이 사건에서는 발주자인 교회의 귀책사유가 있었기에 이를 일반화하기는 어렵습니다. 하지만 법원의 달라진 태도에 건설업계는 해당 판례를 곳곳에 인용하기 시작했고, 건설 현장마다 해당 판례의 법리를 검토하겠다는 공문이 뿌려졌습니다.
KT의 판교신사옥 공사에서도 증액된 공사비 171억의 공사비가 문제가 됐고, 건설사와 발주자인 KT의 소송전으로 끝내 비화되었습니다. 여기서도 마찬가지로 공사비물가변동배제특약이 문제가 됐습니다. 두번에 걸친 법원의 조정에서도 끝내 협상은 결렬되었고 법원 판결로 판결이 나올 예정입니다.
또한 이제는 건설산업기본법 뿐만 아니라 하도급법에도 ‘원사업자가 우월적 지위를 남용해 부당한 특약을 강요할 경우 해당 특약을 무효로 보는 개정안’이 여야 의원 모두에서 발의되었고, 공정거래위원회도 정부입법으로 추진하고 있다고 합니다. 올해 하도급법에서도 부당특약 무효 규정이 신설된 것이 확실해 보이는 만큼 물가변동 배제특약의 효력은 앞으로도 계속 문제될 겁니다.
이제 달라진 분위기에 건설사들은 이제 급등한 공사비의 족쇄에서 벗어날 수 있을지 귀추가 주목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