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축/재개발 · 금융 · 사기
흔히 ‘디벨로퍼’라고 불리는 시행사는 PF 사업을 위해 사업 초기 단계에서 아이템을 물색하고, 입지를 발굴하며, 지주 작업을 통해 토지를 확보한 후 금융권에서 자금을 조달합니다. 국내에도 자금 조달 능력이 뛰어난 시행사가 있기는 하나, 대부분은 소규모이거나 해당 PF 사업만을 위한 특수목적회사(Special Purpose Company, SPC)를 설립하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최근 KDI 통계에 따르면, 우리나라 PF 사업의 평균 자기자본 비율은 3%에 불과한데, 이는 미국, 일본, 네덜란드, 호주 등과 비교했을 때 평균 30~40%에 비해 매우 낮은 수준이라고 합니다.
그럼에도 금융권이 시행사에 자금을 빌려주는 이유는 해당 사업이 수익성이 있는 사업일 뿐 아니라, 시행사가 지주 작업을 통해 사업 부지를 확보했기 때문입니다. ‘지주 작업’은 토지주들로부터 토지를 매입하는 과정으로, 말 그대로 ‘무에서 유를 창출하는’ 일입니다. 대형 금융사나 시공사가 이 과정에 개입하면, 토지주의 기대만 높아져 협상에 실패할 가능성이 크기 때문에 소규모 시행사가 나설 수밖에 없습다. 지주 작업에 짧게는 몇 년, 길게는 십수 년이 소요되기도 합니다.
시행사는 제2금융권을 통해 브릿지 론(Bridge Loan)을 조달하여 토지 매입 자금을 확보합니다. 금융권이 단순히 자금을 빌려주는 것은 아니고, PF 대출에 실패할 경우를 대비해 해당 토지의 신탁계약상 최선순위의 우선수익권자로 등록하거나 시행사 대표의 연대보증을 요구합니다. 시행사 대표가 해당 사업에서 행사할 수 있는 모든 의결권 행사를 중지하고, 대표가 보유한 시행사 주식에도 근질권을 설정해 필요 시 즉시 대주단에 이전할 수 있는 안전장치도 마련해 둡니다.
대형 건설사 출신의 30대 A 대표도 이와 같은 절차를 따랐습니다. 그는 다소 낙후되었지만 입지가 좋은 지역을 사업지로 정하고, 수년에 걸친 지주 작업을 통해 부지를 어렵게 확보했습니다. 제2금융권을 통해 브릿지 론을 조달하여 지주에게 잔금을 지급하고, 토지를 신탁사 명의로 이전했습니다. A 대표는 대형 시공사를 선정해 책임준공확약을 받으면 PF 대출을 성사시켜 사업을 성공시킬 수 있다고 자신했습니다. 기대감에 A 대표는 법인 명의로 슈퍼카까지 구입하였고, 시행업계에서는 30대의 유능한 대표로서 유명세를 치렀지요.
그러나 2022년부터 이른바 ‘레고랜드 사태’ 이후 갑작스레 부동산 시장이 냉각되면서 상황이 급변했습니다. 브릿지 론의 만기는 다가오는데 시공사 선정이 지연되었고, 부동산 경기 침체로 인해 협상을 진행하던 시공사들도 참여를 망설이기 시작했습니다. 시공사가 책임준공확약을 해주지 않으면 PF 대출은 불가능했기에 사업은 난항을 겪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A 대표는 수십 곳의 시공사를 찾아다니며 협력을 요청했으나, 결국 시공사와의 협상을 성사시키지 못했습니다.
대주단도 처음에는 만기가 도래했음에도 1년간 A 대표를 믿고 대출 기한을 연장했으나, 이후에는 더 이상 연장이 어렵다고 판단하여 대출을 회수하기로 결정했습니다. 대주단 회의에서 EOD(Event of Default) 선언을 하기로 결정하고, 브릿지 대출을 대손상각처리하기로 했습니다. 해당 사업장은 추후 부동산 경기가 살아나면 공매에 넘기기로 했습니다.
이때부터 A 대표의 행방이 묘연해졌습니다. 대주단은 A 대표의 모든 주식 권한을 박탈하고 의결권을 제한했지만, A 대표가 법인 인감을 가지고 도주하자 아무런 조치를 취할 수 없었습니다. 대주단은 A 대표를 대표직에서 해임하고자 했으나, 인감이 없으면 등기소에서 등기 신청을 받지 않기 때문에 소송을 통해 법원의 판단을 받아야 하는 상황이었습니다.
대주단은 A 대표에 대한 법적 조치를 취하려 했으나, 그의 행방이 묘연하여 서류 송달조차 어려웠습니다. 공시송달 제도(민사소송법 제194조)가 있기는 하지만, 적용받기 위해서는 주소 보정과 의미 없는 송달을 몇 개월간 반복해야 합니다. 이사로서 직무정지를 위한 절차를 진행했지만 송달 지연으로 결국 임기가 종료되어 실효성이 없어지는 경우도 많습니다. 법원에서는 자산을 압류하기 위한 강제집행 절차도 공시송달에 신중을 기하고 있어서 A 대표에 대한 공시송달 결정을 받기는 매우 까다로웠습니다.
긴 시간 끝에 A 대표는 시행사 대표에서 해임되었고, 법인 명의로 구입했던 슈퍼카는 경매에 부쳐졌습니다. 현재 A 대표는 자금 사기와 횡령 혐의로 경찰 조사를 받고 있으며, 도주 이력이 있어 구속영장이 발부되었습니다.
알고 보니 A 대표가 지주 작업을 하면서 토지주들에게 토지값 외에도 추가로 두둑하게 보상비를 챙겨주겠다는 이면 약정을 하여 토지주들로부터 토지를 넘겨받은 것으로 드러났고, 그렇게 받은 토지 자금 중 일부를 횡령한 것으로 드러났습니다. 지주들은 대주단에게 A 대표에게 속아 넘긴 땅을 도로 돌려달라고 소송까지 제기했지만 전부 패소했으며, 일부 지주들은 대주단을 중개한 증권사 앞에서 1인 시위를 이어가고 있습니다. 어쨌든 일련의 사건들로 인해 A 대표는 업계 블랙리스트에 올라 다시는 PF 업계에 발을 들이지 못할 것으로 보입니다.
한편, 정부가 파악한 결과에 따르면 올해 상반기 기준 증권사의 PF 익스포저 26조5000억 원 중 ‘유의’ 및 ‘부실 우려’로 분류된 사업장은 3조2000억 원으로 12% 수준이며, 증권업계의 충당금과 준비금 규모가 3조4000억 원에 달해 손실을 감당할 여력이 있다고 합니다. 이로 인해 일부 증권사들은 PF 규모를 다시 늘리는 추세입니다.
이러한 기조에 따라 해당 사업장도 공매로 매각될 예정입니다. 정부는 최근 발표한 부동산 PF 연착륙 방안에 따라 PF 사업장에 자금을 공급하고, 사업장이 매각되거나 본 PF로 전환될 수 있도록 지원하겠다고 밝혔습니다.
얼마전부터 미국이 기준금리를 본격적으로 인하하기 시작했습니다. 이에 따라 시중에 유동성이 공급되고 부동산 경기가 회복되면 해당 사업도 리파이낸싱을 통해 본 PF로 전환될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때는 A 대표가 아닌 B 대표가 본 PF에 성공하여 A 대표의 실패를 반면교사로 삼아 그가 뿌린 씨앗까지 회수하여 두둑한 이익을 챙길지도 모릅니다. 그러면 다른 디벨로퍼는 이를 모범사례로 삼고 다른 입지를 분석해 지주 작업을 시작할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