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금융
82세 고령의 예금주가 인감도장에 비밀번호를 기재하고 예금인출 심부름을 시키는 등 개인 정보 관리를 소홀히 한 사이, 사기 공모자들이 주민등록증을 위조하고 예금 통장 및 인감을 변경하여 총 6억 4천 6백만원을 인출한 사건입니다. 은행은 예금 인출 과정에서 예금주의 의사를 제대로 확인하지 않은 과실이 인정되었으나, 예금주의 개인 정보 관리 소홀이 공동불법행위를 방조한 것으로 볼 수 있는지 여부가 쟁점이 되었습니다. 대법원은 예금주의 과실이 사기 범죄를 구체적으로 예견할 수 있었던 경우에 해당한다고 보기 어렵고, 은행의 본인확인 의무 소홀이 주된 원인으로 보인다고 판단하며, 원심 판결을 파기하고 사건을 환송했습니다.
원고는 82세의 고령으로 기억력 감퇴를 걱정하여 인감도장에 예금계좌의 비밀번호를 표시해두었으며, 가끔 집사 및 다방 주인에게 예금인출 심부름을 시켰습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소외 3 등 사기 공모자들은 소외 1로부터 원고의 주소, 주민등록번호, 예금계좌 정보 및 비밀번호를 넘겨받았습니다. 이후 김사장에게 원고와 비슷한 연령의 여성 사진을 부착하고 원고의 인적 사항을 기재한 위조 주민등록증을 만들게 했고, 원고 명의의 휴대전화도 개통했습니다. 2012년 4월 2일, 소외 3은 성명불상자를 원고로 사칭하여 은행 남양주지점에서 원고의 통장 및 인감 분실 신고를 하고 재발급 및 인감 변경을 하였으며, 곧바로 텔레뱅킹을 신청했습니다. 같은 날, 이들은 서울 양재동 지점에서 변경된 인감을 이용하여 3억 6천만원을 인출하였고, 그 날부터 2012년 5월 19일까지 텔레뱅킹을 통해 총 20회에 걸쳐 2억 8천 6백만원을 추가로 인출하여 총 6억 4천 6백만원을 편취했습니다.
이 사건의 주요 쟁점은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피고 은행이 예금지급청구자의 정당한 예금인출 권한 여부를 확인하지 않은 채 예금을 지급한 과실이 있는지 여부. 둘째, 원고 예금주가 자신의 예금 통장, 인감, 비밀번호 등을 관리 소홀히 한 것이 사기 공모자들의 불법행위를 방조한 공동불법행위에 해당하여 은행의 손해배상 책임이 경감될 수 있는지 여부였습니다.
대법원은 원심판결을 파기하고, 사건을 서울고등법원에 환송했습니다. 피고 은행의 예금 인출 시 주의의무 위반 과실은 인정하여 은행의 상고를 기각했습니다. 그러나 원고 예금주의 개인 정보 관리 소홀이 공동불법행위 책임으로 이어진다는 원심의 판단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이유로 법리 오해가 있다고 보았습니다. 예금주가 인감도장에 비밀번호를 표시하고 심부름을 시킨 행위만으로는 사기 공모자들이 사기 행위를 저지를 것을 구체적으로 예견할 수 있었다고 인정하기 어렵고, 오히려 은행이 거래 상대방의 본인확인 의무를 다하지 못한 과실로 인해 사기가 초래되었다고 판단했습니다. 따라서 원고의 행위와 사기 발생 사이에 상당인과관계를 인정하기 어렵다고 보아, 원고에게 공동불법행위 책임이 있다고 본 원심판결은 잘못되었다고 판시했습니다.
대법원은 은행이 예금주의 본인확인 의무를 소홀히 한 과실을 인정하면서도, 예금주가 개인 정보 관리를 소홀히 한 것이 사기 행위를 방조한 공동불법행위로 인정되려면 예금주가 자신의 행위로 인해 사기가 발생할 것을 구체적으로 예견할 수 있었고 그 행위와 피해 사이에 상당한 인과관계가 있어야 한다는 법리를 명확히 했습니다. 이 판결은 단순히 개인 정보 관리가 미흡했다는 이유만으로 금융 사기 피해자에게 무조건적인 공동불법행위 책임을 묻는 것은 부당하며, 금융기관의 본인확인 의무가 매우 중요하다는 점을 다시 한번 강조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이 사건과 관련된 주요 법령과 법리는 다음과 같습니다.
민법 제760조 제1항 (공동불법행위의 성립 요건): 수인이 공동으로 타인에게 손해를 가할 경우 각 행위가 독립된 불법행위의 요건을 갖추면서 객관적으로 관련되고 공동하여 위법하게 피해자에게 손해를 가한 것으로 인정되어야 공동불법행위가 성립하며, 가해자들은 피해자에게 연대하여 손해를 배상할 책임이 있습니다.
민법 제760조 제3항 (방조자의 책임): 타인의 불법행위를 방조한 자도 공동불법행위자로 보아 책임을 부담시킵니다. 여기서 '방조'는 불법행위를 용이하게 하는 직접적, 간접적인 모든 행위를 의미하며, 손해 전보를 목적으로 하는 민사법 영역에서는 과실에 의한 방조도 가능합니다. 다만, 과실에 의한 방조의 경우, 방조자는 불법행위에 도움을 주지 말아야 할 주의의무가 있음을 전제로 하여 그 의무를 위반했을 때 책임을 집니다. 또한 방조 행위와 피해자의 손해 발생 사이에 상당한 인과관계가 있어야 하며, 특히 과실에 의한 행위가 해당 불법행위를 용이하게 한다는 사정을 구체적으로 예견할 수 있는 경우라야 공동불법행위 책임이 인정됩니다. 이러한 예견 가능성은 과실이 피해 발생에 끼친 영향, 피해자의 신뢰 형성 기여 정도, 피해자 스스로 쉽게 피해를 방지할 수 있었는지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하여 판단됩니다.
채권의 준점유자에 대한 변제 (민법 제470조 관련): 채권의 준점유자, 즉 외형상 채권자로 보이는 자에게 변제했을 경우, 변제자가 선의이며 과실 없이 변제했다면 그 변제는 유효하게 됩니다. 그러나 이 사건에서 은행은 예금지급청구자에게 정당한 변제수령 권한이 없을 수 있다는 의심을 할 만한 특별한 사정이 있었음에도 예금주 본인의 의사를 확인하는 등 주의의무를 다하지 않았으므로, 과실이 인정되어 유효한 변제가 아니라고 판단되었습니다.
금융기관의 본인확인 의무: 금융기관은 예금 지급 시 예금지급청구자에게 정당한 예금 인출 권한이 있는지 여부를 조사해야 할 업무상 주의의무가 있습니다. 특히 예금지급청구자에게 정당한 변제수령 권한이 없을 수 있다는 의심을 할 만한 특별한 사정이 있는 경우에는 예금주의 의사를 확인하는 등의 방법으로 본인확인 의무를 철저히 해야 합니다.
유사한 문제 상황에 직면했을 때 참고할 만한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금융 정보(통장, 인감, 신분증, 비밀번호 등)는 아무리 가까운 사이라도 타인에게 절대로 쉽게 노출하거나 공유해서는 안 되며, 다른 사람에게 예금인출 등 금융거래 심부름을 시킬 경우 더욱 각별한 주의가 필요합니다. 특히 비밀번호를 중요한 문서나 인감 등 다른 물품에 기재하는 행위는 매우 위험합니다. 둘째, 은행은 고객의 예금 인출 시 예금주 본인임을 철저히 확인해야 할 의무가 있으며, 특히 분실 신고 후 통장 재발급이나 인감 변경, 거액 인출 등 평소와 다른 특이 거래가 발생할 경우 더욱 면밀하게 본인 확인 절차를 거쳐야 합니다. 만약 은행이 이러한 주의의무를 소홀히 하여 피해가 발생했다면 은행에 책임을 물을 수 있습니다. 셋째, 자신의 과실이 타인의 범죄 행위를 방조하여 공동불법행위 책임으로 이어지기 위해서는 해당 과실 행위가 범죄를 용이하게 할 것이라는 점을 구체적으로 예견할 수 있었고, 그 과실과 피해 발생 사이에 상당한 인과관계가 인정되어야 합니다. 단순히 개인 정보 관리 소홀만으로 모든 사기 피해에 공동불법행위 책임을 지는 것은 아닙니다. 넷째, 고령층의 경우 인지 능력 저하로 인해 금융 사기에 취약할 수 있으므로, 가족이나 신뢰할 수 있는 지인이 금융 거래를 도울 때에는 매우 신중하게 접근하고, 필요한 경우 은행에 대리인 지정 등의 보호 장치를 마련하는 것을 고려해야 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