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축/재개발
정비사업을 추진하는 주체는 조합입니다. 하지만 조합 설립 전에 일단 정비구역이 지정되면 ‘00재건축(재개발)사업 추진위원회‘(일명 ‘추진위‘)부터 먼저 결성됩니다. 정비사업 초기 단계에서부터 사업의 기본 방향을 설정하고 필요한 준비 작업을 수행해야 하지만, 조합을 바로 설립하기에는 부담이 있으므로 비교적 소규모 조직과 간소화된 의사결정 구조를 통해 신속하게 사업 초기 단계의 업무를 수행하도록 하여 정비사업의 효율성을 높이는 겁니다.
추진위의 가장 큰 임무는 조합 설립을 위해 필요한 동의를 받아내는 겁니다. 사업 부지의 토지등소유자 과반수의 동의를 얻어야 추진위를 구성할 수 있으므로 추진위 단계에서도 조합 설립을 위한 어느 정도의 동의는 갖추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도시정비법 제31조 제1항). 하지만 조합 설립을 위해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정식으로 조합 설립 인가를 얻기 위해서는 재개발과 재건축의 기준은 각기 다르지만, 공통적으로 사업 부지의 토지등소유자 4분의 3 이상의 동의를 얻어야 합니다(도시정비법 제35조 제2항 내지 제4항). 따라서 추진위의 주요 임무는 추진위 설립에 동의하지 않은 나머지 25%(조합 설립 요건 75% - 추진위 설립 요건 50%)의 토지등소유자를 설득해 이들을 조합원으로 참여시키는 겁니다.
어쨌든 추진위 단계가 되면 웬만하면 조합 설립이 가능하기에 추진위 또한 조합 못지않은 막강한 권한을 가지게 됩니다. 추진위원장이 되어 해당 사업의 초기 방향을 설정하면 사업 전반을 잘 알게 되고, 이후 조합이 설립되면 추진위원장이 조합장까지 이어지는 경우가 흔합니다. 추진위원장과 조합장을 착각해서 그런지, 조합장이 더 친숙한지 몰라도, 추진위원장을 조합장이라고 부르는 경우도 많습니다. 대통령보다 당선인의 권력이 큰 것처럼, 추진위원장이 되면 조합장처럼 시공자 선정은 물론 추후 시공자 및 협력업체 선정에도 상당한 영향을 미칠 수 있습니다.
특히 과거에는 시공자가 조기에 선정되면 추진위도 시공자로부터 사업비를 조달받고 초기 단계에서 조력을 받을 수 있어 추진위 단계에서 시공자를 선정하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로 인해 추진위가 특정 시공사와 유착하는 사례가 빈번해져 사회적 문제가 되었습니다. 이에 대법원은 시공사 선정은 조합총회의 고유 권한이며, 추진위 단계에서 토지등소유자 총회를 통해 시공사를 선정하기로 한 결의는 무효라고 판단했습니다(대법원 2008. 6. 12. 선고 2008다6298 판결). 이러한 판례를 반영해 2009년 2월 도시정비법이 개정되어 조합 설립 인가 후에 비로소 시공사를 선정하도록 규정되었습니다(도시정비법 제29조 제4항).
그럼에도 추진위 단계에서 조합의 중요 사항에 대한 약속을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추진위는 조합이 설립되면 수행한 업무를 총회에 보고해야 하며, 그 업무와 관련된 권리와 의무는 조합이 총회에 보고하면 포괄적으로 승계됩니다(도시정비법 제34조 제3항). 즉, 총회의 결의를 거칠 필요 없이 추진위의 보고만으로도 조합이 그 권리와 의무를 승계한다는 뜻입니다.
이에 따라 협력업체 입장에서는 추진위와 계약을 체결하는 것이 조합원(또는 대의원)의 과반수 동의를 얻어야 하는 조합과 계약을 체결하는 것보다 더 용이할 수 있습니다. 반면, 이후 조합이 추진위 단계에서 진행했던 사업을 조합원들의 의사와 무관하게 수용해야 한다는 비판도 제기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이유로 법원은 추진위가 용역 계약을 체결하는 것을 엄격히 해석하고 있습니다. 추진위는 설계, 개략적인 정비사업 시행계획서 작성, 조합 설립 인가를 위한 준비 업무(추진위 운영 규정 작성, 토지등소유자의 동의서 징구, 조합 설립을 위한 창립총회 개최, 조합 정관 초안 작성) 및 추진위 운영 규정으로 정하는 업무만을 수행할 수 있습니다.
추진위는 시공자를 선정할 수는 없지만, 정비사업전문관리업자(즉, 정비업체)를 선정하여 자신의 업무를 대행하게 할 수 있습니다. 정비사업 경험과 지식이 부족한 추진위가 정비업체의 전문적인 도움을 받는 것은 오히려 필요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추진위가 이후 조합의 업무를 대행할 정비업체를 선정할 권한은 없습니다. 추진위가 정비업체를 선정해 업무를 맡기더라도 이는 추진위의 권한 범위에 한정될 뿐, 조합의 업무를 대행할 것을 약속해도 법률상 구속력은 없으며 조합에 포괄 승계되지 않습니다(서울고등법원 2022. 6. 22. 선고 2021나2043911 판결, 심리불속행 기각으로 확정). 물론 추진위 단계에서부터 선정한 정비업체의 업무수행에 큰 불만이 없다면 조합의 업무도 위탁받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한편, 광주의 한 재개발조합 추진위는 약 2,200여 평을 소유한 A로부터 해당 부지를 매입하기로 약정하고, 필요한 부분은 2개 이상의 감정평가법인의 감정가 평균으로 현금 보상하고, 나머지 부분은 구획 정리를 완료한 다음 일반 상업용지로 환지 보상하기로 했습니다. 추진위는 조합 설립 요건(토지 소유자의 50% 동의)을 충족하기 위해 상당한 토지를 소유한 A의 동의가 반드시 필요했으므로, A에게 두둑한 현금 및 현물 보상을 약속하고 동의를 얻었다. A의 입장에서는 재개발 사업과 무관하게 자신은 상당한 보상을 받고 엑시트할 수 있다고 생각했을 겁니다. 그러나 조합이 설립되고 사업에 대한 자신감이 사라지자 조합은 A의 요구를 들어주지 않았습니다.
이에 A는 조합이 추진위의 권리와 의무를 포괄 승계하였으므로 추진위의 약정에 따라 138억 원을 지급하고 토지 소유권을 이전하라고 소송을 제기했습니다. 하지만 대법원은 추진위의 약정은 효력이 없다고 판결했습니다(대법원 2024. 12. 12. 선고 2024다260405, 2024다260412 판결). 추진위가 토지등소유자에게 현금이나 현물 보상을 약정하는 것은 법령에서 정하는 추진위의 권한 범위를 벗어나므로 조합에는 효력이 없다는 겁니다.
A는 이럴 줄 알았으면 처음부터 조합 설립에 동의하지 않았을 것이라며 분통을 터트렸지만, 이는 추진위의 약속을 순진하게 믿은 스스로를 탓할 수밖에 없습니다. 만약 A가 동의를 해주지 않았다면 재개발 조합은 설립되기도 어려웠을 겁니다. 결국 A는 남 좋은 일만 시킨 일이라며 억울해 할지 모릅니다. 하지만 좋던 싫던 조합원으로 남게 된 A는 이제 재개발사업의 조합과 한 배를 타고 사업성공을 기원할 수밖에 없게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