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예계약 아닙니다. 약속한 대로 하셔야죠.

시공사에게 노예계약이라 불리는 ‘책임준공확약’

건설업계가 부동산 PF(Project Financing)로 위기라고 합니다. 대출(즉, 법률상 ‘소비대차계약’)은 차주인 채무자의 신용을 토대로 이뤄지나 PF 대출은 사업의 수익성을 보고 결정됩니다. 대출이 승인되려면 대주, 즉 채권자가 보더라도 ‘돈 되는 사업’이어야 합니다. 탁월하게 입지가 좋은 경우가 아니라면, 대주단은, 일정한 신용등급 이상을 충족한 시공사 명의의 책임준공확약서까지 요구합니다. 책임준공확약서가 제출되지 않으면 대출은 승인하지 않았고요.

2020년부터 코로나19 이후 Fed(연방준비위원회)의 양적완화 및 제로금리 정책으로 전 세계적으로 막대한 유동성이 공급되면서 자고 일어나면 부동산 가격이 치솟았습니다. 부동산 경기가 최정점을 찍을 2021년까지 금융권에서는 수많은 PF 대출이 승인됐고 그 과정에서 시공사 법인인감이 찍힌 수 많은 ‘책임준공확약서’가 금융권에 제출됐습니다. 물론 시공사 또한 나름 계산기를 두드려 돈이 된다고 판단했을 겁니다. 이렇게 책임준공확약을 한 시공사는 부동산 개발사업에 직접 뛰어들며 사업리스크를 짊어지게 된 셈입니다.

시공사가 제출한 책임준공확약서는 어떻게 기재되어 있을까요. 대부분 아래와 같은 취지로 적혀 있습니다(비교적 짧은 버전만 인용하면 아래와 같습니다).

건설업계에서 ‘노예계약’이라고까지 불리는 책임준공확약의 기재에 따르면 시공사는 천재지변, 내란, 전쟁 등 불가항력적인 경우를 제외하고 어떤 경우에도 약속된 기한 내에 공사를 끝내야 합니다. 굴지의 1군 시공사들이 약속된 기간 안에 공사를 책임지겠다고 확약해야 금융권의 대주도 안심하고 대출을 실행합니다.

만약 약속된 기한을 맞추지 못하면 시공사는 PF 대출채무를 조건없이 모두 인수해야 합니다. 약속한 기한을 맞추지 못하는 채무불이행 사유가 발생하는 순간, 보다 정확하게는 대주단이 기한이익 상실, 즉 EOD(Event of Default)를 통지하는 순간, 시공사는 두둑한 시공이익을 챙기기는커녕 엄청난 규모의 우발채무를 인수하고 이로 인해 회사가치가 곧두박질쳐 주주들에게 엄청난 원성을 들어야 할 노릇입니다.

하지만 공사도 어쨌든 사람이 하는 일이고, 상황에 따라 늦어질 수 있기에 조금 늦어지더라도 대주와 시공사가 서로 좋게 좋게 해결하는 것이 업계의 관례였습니다. 대주 입장에서도 EOD를 선언하게 되면 예상 손실액을 (연결) 재무제표에 반영하고 충당금을 더 쌓아야 하는 등 골치가 아플 수밖에 없습니다. 따라서 대주단은 별다른 문제가 없으면 그간 준공기한을 너그럽게 연장해 주었습니다. 심지어 도저히 살아날 기미가 없지만 EOD 선언을 하지 않고 기한을 계속 연장해 주면서 부동산 경기가 살아나길 기다리는 사업장까지 있어서 당국의 눈초리를 받기도 했습니다.

‘불가항력’ 깐깐하게 보는 법원, 시공사는 준공 맞추기에 혼신

그런데 분위기가 심상치 않습니다. A 사업장 사례를 보겠습니다. 대구에서 아파트와 근린생활시설을 건설하는 PF 사업장에서의 책임준공시한은 2024. 1. 22.이고 시공사는 약 2개월을 조금 넘어선 2024. 3. 29. 공사를 완료했습니다. 2개월이면 대주단이 좋게 넘어갈 수도 있는 정도로 볼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달랐습니다. 대주단은 시공사에게 책임준공확약서에 적힌 그대로, 대출금 전액인 약 800억 원의 채무를 갚으라고 얄짤없이 요구했습니다. 팍타 순트 세르반다(pacta sunt servanda)라는 법 원칙에 따라 약속은 지켜져야 한다는 겁니다.

갑자기 달라진 대주의 태도에 시공사는 ‘독박 씌우기’라며 억울함을 표시했습니다. 고작 두 달 완공이 늦었다고 PF 대출금 전부를 책임지라는 건 너무하다는 겁니다. 결국, 도저히 PF 대출금을 책임지지 못하겠다며 21개의 대주단을 상대로 가처분을 신청했습니다. 하필 착공 무렵에 광주 빌딩 붕괴 사고가 터졌고 철거 행정지도가 깐깐해져 착공이 71일 지연됐습니다. 착공 이후에도 코로나19 확산, 화물연대 총파업, 레미콘 8ㆍ5제 도입 및 토요 휴무제 시행 등으로 인한 콘크리트 타설 지연 등 각종 사유로 약 78일의 공기지연이 발생했는데, 이러한 사유는 모두 책임준공확약서에 규정된 ‘불가항력의 사태’에 해당한다는 겁니다.

하지만, 법원은 시공사의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책임준공확약서에 기재된 대로 그대로 책임을 지라는 겁니다. 대출약정을 체결할 당시는 이미 코로나19가 발생한 때로부터 상당한 기간이 지났고, 각종 절차가 지연될 수 있음은 충분히 예견할 수 있었을 것으로 봤습니다. 또 전면적인 봉쇄 조치까진 취해지지 않았으며, 광주 빌딩 붕괴 사태로 인한 행정지도 강화는 각종 공사를 진행하는 과정에서 통상적으로 발생할 수 있으며, 레미콘 8ㆍ5제 도입 및 토요 휴무제 시행이나 레미콘 등 자재의 수급ㆍ관리는 원칙적으로 시공사의 책임영역 안에 있는 사항이라는 취지입니다. 화물연대 총파업 이후 적극적으로 대체 업체를 물색하는 등의 방법을 했을 수 있었다고 판단했습니다. 즉, 시공사가 주장한 사유들은 책임준공확약서에 적힌 ‘불가항력의 사유’에는 해당하지 않는다는 겁니다.[1]

연휴로 고작 1일 지난 경우는 신의칙 상 인정 안되

반면, 안산에서 물류센터를 신축하는 B 사업장에서는 시공사는 책임준공기간을 1일 도과하여 사용승인을 받았습니다. 그러자 대주단은 시공사에게 830억 원이 대출금 반환채무를 인수하라고 하자, 시공사는 반발했습니다. 특히 준공에 소요된 기간 중 3일은 관공서 휴무일(3. 1절 및 토ㆍ일요일)인데, 그 기간이 없었으면 기한 내에 준공이 되었을 거라고 억울함을 호소했습니다. 이 사안에서는 법원도 시공사의 손을 들어 주었습니다. 책임준공을 1일 지연하였다는 이유로 830억 원의 채무를 인수하는 것은 신의성실의 원칙에 위반될 수 있다며 채무인수의 효력을 정지한 것입니다.[2] 준공일을 고작 1일을 넘긴 경우고, 연휴가 끼인 탓인데 무려 830억을 뱉어내라는 것은 너무 과다하다는 것이지요. 해도 해도 너무 한다는 볼멘소리가 나오는 것도 이 때문입니다.

건설업계는 달라진 금융권의 태도에 촉각을 기울이고 있습니다. 이제 약속한 준공기한을 맞추지 못하면 울며 겨자 먹기 식으로 수백억 원에서 수천억 원대의 빚을 떠 앉을 수도 있습니다. 책임준공확약을 한 시공사들은 일말의 여지조차 남기지 않기 위해 준공기한 맞추기에 혼신을 다해야 할 상황입니다.

건설사의 투자자들은 아직 재무재표에 반영되지 않은 우발부채가 공시되어 신용도가 하락하지 않을까 우려를 표하고 있습니다. 수분양자들은 건설사가 무리하게 준공기한을 지키려고 날림으로 공사를 하지 않을까 걱정하고 있습니다.

체크포인트

• PF 사업장에서 시공사는 책임준공확약을 하고, 책임준공기한을 지나면 수백, 수천억 대의 채무를 인수해야 한다.
• 책임준공확약에 불가항력 사유는 매우 엄격하다. 왠만한 사유는 해당하기 어렵다
• 건설사는 책임준공기한을 맞추기 위해 혼신을 다해야 한다. 투자자는 우발부채를, 수분양자는 부실시공에 유의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