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축/재개발
정비사업에서 조합장은 시공사와 수많은 협력업체를 선정하는 과정에서 막강한 권력을 가집니다. 과거 강남에서 대형 건설사 수주로 재건축사업이 성공한 조합에서는 10억 넘는 성과급을 조합장에 기꺼이 지급하며 추앙한 전례도 있습니다. 하지만 대부분 조합장과 임원들이 월급만 받고 일을 제대로 하고 있는지, 시공사에 너무 치우친 건 아닌지 의심의 눈초리를 받게 됩니다.
그래서 어떤 조합이든 기존 조합장을 반대하는 비상대책위원회(일명 ‘비대위’)가 결성되고, 어떤 사건이 계기가 되면 비대위가 주축이 되어 조합장이 교체되는 일도 비일비재합니다. 조합원의 수가 많아 이해관계가 복잡한 대규모 정비사업장에서는, ‘비대위의 비대위’, 심지어 ‘비대위의 비대위의 비대위’까지 결성됩니다.
조합 임원은 조합원 10% 이상의 요구로 소집된 총회에서 조합원 과반수의 출석과 출석 조합원 과반수의 동의를 받아 해임할 수 있습니다(도시정비법 제43조 제4항). 따라서 가가호호 방문하든 연판장을 돌리든 조합원 전체의 10% 동의만 확보하면 비대위는 조합장 해임총회를 소집할 수 있고, 해임총회에서 과반수 동의를 받으면 조합장을 해임할 수 있습니다.
해임되는 조합장에게 청문 등의 소명 기회는 주어야 합니다. 알려진 바와 달리 조합장 해임은 그 사유의 제한이 없습니다. 조합장이 그냥 마음에 안 들어도 해임할 수 있습니다. 물론 법적인 제한이 없다 해도 다수의 조합원을 설득해 정족수를 충족하기 위해서는 잘 정돈된 해임사유가 필요하기는 합니다.
그렇게 조합장이 해임되면 해임된 조합장은 또 다른 조합장을 견제하는 비대위가 되어 또 다른 해임총회를 기획하기도 합니다. 해임총회가 남발되면 조합과 사회적 비용 증가로 귀결될 수밖에 없습니다. 현행 도시정비법상의 10%의 해임총회 허들이 너무 낮고, 그 비율을 20%로 올려야 한다는 주장도 이 때문입니다.
무슨 계기가 되든 비대위가 주도한 해임총회가 본격적으로 소집되면, 조합장도 그저 당하고 있을 리 없습니다. 조합장은 해임총회의 소집절차에 하자가 있습니다거나 비대위가 징구한 서면결의서에 위조된 흔적이 있어서 정족수를 충족하지 못했다는 사정을 주장하면서, 법원에 가처분을 신청합니다. 조합장은 총회를 개최하기 전에는 총회 개최 금지 가처분, 개최한 후라면 총회 효력 정지 가처분을 제기해 해임총회의 효력을 다툴 수 있습니다. 조합장이 계속 해임총회에 불복해 조합 인감을 내놓지 않으면 조합장에 대한 직무집행정지 가처분을 해야 하고, 인용되면 조합장 해임을 조합 등기사항전부증명서에 등기하고 그제야 직무대행자 명의의 조합 인감을 발급받을 수 있습니다.
이처럼 해임총회를 한번 할 때마다 총 3번의 가처분 재판을 거칠 수도 있습니다. 여기에 총회결의 무효확인의 소와 같은 본안 재판이라도 제기되면 소송에서 1~2년의 세월이 후딱 지나가기도 합니다. 여기에 항소, 상고라도 하면 재판 시간 갑절의 시간이 더 소요될 수도 있고, 재판이 끝나면 조합장 임기가 이미 지나버리는 경우도 다반사입니다.
재판에서 조합이 당사자가 되는지, 원고인지 피고인지도 중요합니다. 이에 따라 조합의 비용으로 소송비용을 조달할 수 있을지가 달라지기 때문입니다. 일단 조합비로 소송비용을 댈 수 없는 비대위로서는 십시일반으로 각출하든, 친한 변호사에게 간곡하게 부탁하든 일단 소송비용 문제를 해결하고, 소송대리인을 통해 재판에서 해임총회의 절차와 정족수 충족 과정 문제가 없음을 적극적으로 밝혀야 합니다.
그렇게 해임총회를 앞두고 조합장 측과 비대위 측이 해임총회를 앞두고 투표 대결을 하면, 비교적 중립적인 입장에 있는 다수의 조합원은 조합장과 비대위 중 어느 쪽에 힘을 실어줄지 고민합니다. 다수의 조합원은 누가 조합장이 되든 크게 관심은 없습니다. 물론 기존 조합장이 못마땅하지만, 혹시 조합장이 바뀌면 공사 기간이 늘어나거나 분담금이 늘어날지가 가장 고민인 점입니다. 조합장도 이 점을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조합장이 교체되고 공사 기간과 분담금이 늘어나면 비대위가 책임질 거냐’라는 캐치프레이즈를 만들어 재신임을 호소합니다. 반면 비대위는 ‘조합장 교체와 공사 기간이나 공사비는 관계가 없다’고 주장합니다.
해임총회가 실제로 일어나기 전까지 비대위 측에서는 최소한의 정족수를 충족하거나 이에 근소하게 미달하는 수의 ‘서면결의서’를, 방어하는 조합장 측에서는 ‘서면결의서의 철회서’를 확보합니다. 나아가 비대위는 만일의 경우에 대비한 ‘서면결의 철회서의 재철회서’，심지어 ‘최종 서면결의확인서’까지 받아 놓고 표 대결을 벌입니다(물론 서면결의 철회서의 재철회를 한다고 해서 기존의 서면결의의 효력은 부활하지 않습니다). 그 과정에서 조합장 측과 비대위 측이 고용한 다수의 OS 요원들이 동원되고 모순된 서면결의서와 철회서가 발견돼 재판에서 필적감정을 통해 서면결의서의 진위가 다퉈지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실제로 조합장이 변경되면 공사비와 분담금이 실제로도 늘어날까요. 조합은 시공사를 선정해 공사도급계약을 체결하고 실제 공사는 시공사가 진행합니다. 즉 시공사는 조합과의 공사도급계약에 정해진 기한대로 공기를 맞춰 시공해야 합니다. 설사 조합 내부의 권력투쟁으로 조합장이 교체된다고 하더라도 시공사에는 남의 일입니다. 즉, 조합장이 바뀐다고 해서 기존에 약속된 공사비나 분담금이 늘어나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조합 임원 전원이 해임되는 경우는 양상이 조금 다릅니다. 비대위 입장에서는 한두 명의 이사를 남겨두고 해임하더라도 그들이 기존 조합장 측의 인사라 결국 전원에 대한 해임을 선택하는 경우도 종종 있습니다. 이렇게 조합 임원이 모두 해임되면 조합 내부에서는 의사결정을 할 직무대행자가 없게 됩니다. 조합 정관에는 조합장의 유고나 해임 시 직무대행 순서를 정해 놓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러한 직무대행은 이사 중에서 정해야 하는데, 이사가 모두 해임되었을 경우 조합은 이사회를 개최할 수 없고, 각종 비용의 지출을 승인하기 위해 대의원회나 총회에 상정할 안건도 상정할 수 없게 됩니다. 새로운 조합장을 선출하기 위한 총회를 개최하는 데도 상당한 어려움이 있습니다.
이런 경우를 대비해 도시정비법에서는 조합 임원의 해임 등으로 직무를 수행할 수 없는 상태가 된 후 6개월이 지나면, 시장이나 군수가 전문조합관리인을 선정해 조합 임원의 업무를 대행할 수 있도록 하고 있습니다(도시정비법 제41조 제5항 제1호). 하지만 무려 6개월을 기다려야 하는 이 선택지는 조합원들에게 절대 만족스럽지 않습니다. 결국 법원에 직무대행자나 임시이사를 선임하는 별도의 절차를 거쳐야 합니다. 그런데 법원에서도 직무대행자 신청을 받으면 관할 지방변호사회에 직무대행자(보통 ‘변호사’입니다)의 추천을 요청합니다. 이후 법원의 변호사회 추천과 회신, 법원의 직무대행자 선임, 직무대행자를 등기하는 절차에서 이미 수 개월이 소요되는 경우가 다반사입니다. 이렇게 공석 상태가 길어질수록 조합원의 불만은 계속 쌓이게 됩니다. 그렇게 선임된 직무대행자가 과연 조합 일을 자기 일처럼 열심히 할지도 미지수입니다.
문제는 공석 상황에서 조합의 중요한 의사결정을 하지 못하는 경우입니다. 이러한 의사결정을 진행하지 못할 경우 시공사와의 공사도급계약 위반 문제로 이어지고, 그로 인해 공사 기간 연장이나 분담금 증가로 이어질 수도 있습니다. 즉, 조합장을 해임했다고 해서 무조건 공사 기간이 연장되는 것이 아니라, 조합의 중요한 의사결정이 늦어질 경우 그런 문제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
